미국이 지난 2월 정찰풍선 사건 이후 급속히 냉각된 미중 관계의 개선에 나선 데 대해 경제 문제가 주요 배경으로 지목된다. 중국 역시 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최근 양국이 반도체 분야를 중심으로 견제를 주고받으면서 기업이 피해를 입는 구도가 반복되는데, 이는 서로에게 손해라는 판단 아래 미국이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을 보내 대화 창구를 열었다는 것. 미국은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위험 제거)'으로 대중국 전략 표현을 바꾼 상태다.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낼 수 있는 유일한 국가가 중국이라는 점도 요인이 됐다는 분석이다.
블링컨 장관은 19일(현지시간) 시진핑 국가주석과 중국 베이징에서 회담 후 재중 미국대사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중국 고위급 회담에서) 미국 기업들에 대한 중국의 부당한 처사에 대한 우려를 포함, 경제정책에 대한 견해를 교환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국에서 사업하고 있는 미국 경영인들이 상당한 애로사항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며 "회담에서 미국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고자 노력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조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과학법 서명 이후 미국은 대중 반도체 견제책을 지속해왔다. 반도체과학법은 중국 사업을 확장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 내 반도체 시설을 건설하는 기업에 보조금, 세제 혜택을 제공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후 미국은 18나노 이하 D램 등 첨단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주요 장비를 중국에 수출하려면 별도 허가를 받도록 추가 제재를 내렸다. 외교무대에서도 한국, 대만, 일본에 '칩4 동맹'을 제안, 중국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이런 가운데 미국 반도체기업 마이크론이 '희생양'이 됐다. 미국이 고삐를 죄자 중국은 보안 문제를 이유로 정부기관에 마이크론 제품을 구매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로이터에 따르면 마이크론은 중국 측 보복조치로 중국 시장 매출이 두 자릿수 감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마이크론 매출 중 중국·홍콩 시장 지분이 4분의 1 이상인 점을 감안하면 매출에 직격탄을 맞은 것. 그럼에도 마이크론은 지난 16일 중국 시안 반도체 공장에 43억 달러를 투자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뿐만 아니라 애플, 테슬라 등 주요 미국 기업들은 여전히 중국 시장을 중요시한다.
블링컨 장관은 "양국 무역규모는 지난해보다 더 늘어 7000억 달러에 이르렀다"며 "재닛 옐런 재무장관의 경고처럼 미중 교역과 대중 투자가 중단된다면 재앙이 올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도 미국 제재로 반도체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상당한 피해를 봤다. 특히 2035년까지 인민해방군을 현대화하기 위한 군 장비 개편 작업에 막대한 차질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경기침체로 인해 악화된 국내 여론을 달래고, 브릭스(BRICS) 등 국제무대에서 국력을 증명하려면 전략자원인 반도체 수급 안정이 필수인 상황이다. 조지 매그너스 옥스퍼드대학 중국센터 연구원은 블룸버그TV 인터뷰에서 "중국은 제3세계에 자국 지위를 과시하고 싶을 것"이라며 더 이상 경제적 피해를 묵과할 수 없어 대화에 나섰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이 북한과 대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파트너라는 점도 중요하게 작용한 것으로 관측된다. 블링컨 장관은 "국제사회는 북한이 미사일 발사를 멈추고 책임있게 행동하길 촉구하고 있다"며 "중국은 평양이 위험행동을 중단하고 대화에 나서도록 압박할 수 있는 유일한 지위에 있다"고 했다.
미중 양측에선 블링컨 장관 방문으로 대화가 재개된 데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중국 관영 환구시보는 20일 게재한 '미국의 신뢰성을 다시 검증할 때'라는 논평에서 "모든 당사자가 낮은 기대감을 갖고 있던 블링컨 장관의 방중에서 몇 가지 구체적 합의에 도달했고 효율적으로 소통했다"며 "이번 방문이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 어려울 순 있지만 중미 관계는 긍정적인 진전을 이뤘다"고 평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블링컨 장관의 방중 성과에 대해 "(양국이) 옳은 길을 향하고 있다"고 했다.
부정적인 평가도 있었다. 스티븐 로치 예일대 경영학과 교수는 블링컨 장관이 약 35분 간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고위급 회담이 불과 35분에 불과했다는 것은 기록으로 남을 일"이라고 트위터에 비꼬았다. 블링컨 장관이 시 주석 회담에서 미국은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기존 방침을 재확인한 것을 두고 공화당(야당) 소속 마샤 블랙번 상원의원은 트위터에 "바이든 행정부는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고 블링컨 장관이 중국까지 날아가 시 주석을 달래고 왔다"고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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